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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글

20250612 목 [휘발성 순간]

by 일상수집가 2025. 6. 12.

 어제는 종일 강의를 했다. 오전엔 작업실에서 공모전을 준비하는 수강생 두 분과 대형 작품 만드는 수업을 했다. 이제 제출이 임박한 시기라 시간은 쫓기는데 실질적인 연습을 얼마 하지 못해서 초조한 마음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큰 사이즈의 작업을 하는 수강생분은 바닥에 화선지를 깔아 두고 작품을 만들었고, 비교적 작은 사이즈의 작업을 하시는 수강생분은 책상 위에서 글씨를 적었다. 같은 문구를 여러 번 적어다나 가며 도안을 수정하고 글씨를 다듬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수강생들의 작품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내 초조함은 욕심으로 바뀌었고, 다음 주에 수업을 한 번 더 당겨서 진행하고 공모전에 제출하는 게 어떠냐 제안을 드렸다.

 오후엔 청년센터에 강의를 하러 나갔다. 캘리그라피와 독립출판에 대해 복합적으로 (무려 4시간 동안) 진행하는 강의이다. 내 작품들로 만든 ppt를 감상하다 보면 그림일기 파트가 나온다. 있어 보이려고 '일러스트 에세이'라고 제목을 붙여놓은 파트이다. 수강생분들에게 질문한다. "혹시 지금 일기를 쓰시는 분 있나요? 계시면 손 한 번 들어주시겠어요?" 이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은 손을 들지 않는다. 어제는 두 명의 수강생이 손을 들어주셨다. 그중 한 명은 남자분이셨는데, 남자분이 이 질문에 손을 들어주신 건 정말이지 몇 년만 인 것 같다. 우리가 일기를 쓰지 않는 이유와 재미있게 일기 쓰는 방법 따위를 이야기하고 일기 작품들을 보여드린다. '우동'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나온다. 대중교통을 타고 강의를 하러 다니던 시절, 동서울터미널에 생긴 우동가게를 보고 다음엔 꼭 가봐야지 하며 썼던 글이다. 우동가게에 가보고 싶다는 글이 일기의 전부였고, 결국 그 우동가게는 가보지 못했다. '외할머니'라는 이름의 일기 작품도 나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였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외할머니를 잊고 생활하던 날들이었다. 습관적으로 카톡을 켰고, 새 친구 목록에 '외할머니'가 나왔다. 뭐지? 하고 카톡 프사를 눌러보니 다른 사람의 사진이 올라와있다. '아, 이제 번호 주인이 바뀌었구나.' 괜스레 외할머니를 한 번 떠올리고 싶어졌다. 사진첩을 열어 몇 개 되지 않는 외할머니의 사진을 찾아 그렸다.

 기억은 휘발된다. 사소한 순간일수록 그렇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낚아채지 않으면 순간들은 휘발된다. 오늘 아침 아이와 산책하며 살갗을 타고 흘러났던 선선한 바람이 그렇다. 어제저녁 가족들과 갔던 빵집에서 콧속으로 스며든 빵 냄새가 그렇다. 분유를 먹이며 맡았던 하루의 머리 냄새가 그렇고, 축 늘어진 기저귀의 감촉이 그렇다. 휘발되는 순간들을 모으다 보면 그냥 지나치던 하루들이 의미를 갖고 어느샌가 사는 이유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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